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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8-2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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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진실이 조작된 궁예 황제 이야기』(6)

2026년도 철원문화재단 지역문화예술인 공모지원사업

기사입력 2026-08-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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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꾸눈이 된 사연

군사들이 궁예를 죽이기 위해 들이닥치자 왕비는 아기를 연못으로 던졌고 대기하고 있던 유모가 받았는데 잘못해서 눈을 찔러 실명을 하게 된다. 이어 패물을 가지고 궁에서 도망 나온 유모는 아기를 길렀는데 장난이 심해서 고민하던 유모는 출생 비밀을 알려 준다.

 

* 참고적으로 춘원 이광수는 1954경진사에서 발행한 마의태자에서 궁예의 왕자 이름을 용덕(龍德)’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기운이 처럼 뛰어나면서 이 있었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많은 사람들이 마의태자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는 것을 반대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평생 마로 된 옷만 입고 지낸 태자라고 알고 있는 상식을 뒤엎고 궁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특이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3) 세달사 출가

출생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유모 곁을 떠나 떠돌다가 세달사에 들어가게 된다. 절에서 나온 궁예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竹州箕萱에게 의탁을 하나 자신을 홀대하자 다

시 양길을 찾아가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신임을 얻어서 기병 100명을 이끌고 정복 활동을 나서게 되었는데 그가 향한 곳이 강원도 동쪽이었다.

 

* 세달사에 위치에 대한 의견이 많았으나 현재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 1083-1번지 흥교분교 일대라는 것이 정설이다. 고려시대에는 흥교사(興敎寺)로 불리었고 1980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흥교興敎라 적힌 막새가 출토되는 등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 기병 100명은 규모가 작아 보이나 삼국사기11. 新羅本紀11 眞聖王 5年條. 신라말기의 촌락 인구는 남녀노소 합쳐서 약 100명 남짓이었는데 100명의 장정 군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5~6개 촌락에서 징발을 해야 했고 기병에 필요한 말 100마리도 5개 이상 마을에서 징발을 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양길의 신뢰가 컸던 것으로 추측 된다.

 

궁예가 출가했던 곳으로 알려진 흥교사(세달사) 발굴 현장 궁예의 승려 활동 관련 삼국사기50 궁예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자칭하였다. 장성하게 되어서는 승률에 구애를 받지 않고 건들건들하여 담기가 있었다. 일찍이 제를 올리려 가는데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몰래 바리대에 떨어트렸는데... 자가 쓰여 있었다. 비밀에 부쳐 말을 내지 않고 자부심을 가졌다.

 

위의 내용은 궁예가 승려 생활을 한 것을 노골적으로 부정적 시각을 갖게 하고 있다.

* 궁예는 수련을 거치지 않고 具足戒(구족계, 중이 받는 계율)를 받은 정식 승려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스스로 머리를 깎고 자칭 승려를 하는 근본 없는 중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 절에서 지켜야할 계율에 구애받지 않은 성격으로 기본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듯하다.

* 건들건들한 성격으로 매사에 치밀하거나 책임감이 없는 부정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자를 쓴 물건을 바리대에 떨어트렸다는 것이 까마귀라고 한 것은 삼족오가 아닌 불길을 흉조라는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궁예가 왕의 꿈을 가진 것이 까마귀가 떨어뜨린 물건에서라고 한 것은 궁예가 왕이 된 것이 신라 왕자라는 신분에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라 우연히 얻어진 것이라는 식으로 명분을 퇴색시키려는 시도로 판단된다.

 

4) 궁예의 동진

강원도로 진군을 하게 된 이유는 신라의 세력, 견훤의 후백제 세력,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양길 세력과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원주 석남사에서 기병 100명을 이끌고 출정에 나선 궁예는 영동 지역을 정복하면서 3,500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이때 장군으로 칭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해 한반도 권력 다툼의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 진성왕 810월 궁예가 北原京에서 何瑟羅(강릉)로 들어갔는데 따르는 무리가 600명에 달했고 으로 칭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11에 나오는데 눈여겨 볼 내용이 전투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는 것으로 서로 내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장군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확실한 반란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정권에 반기를 든 세력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성주 또는 장군과 해상세력을 이용하여 경제적 부와 세력을 형성한 軍鎭勢力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참고적으로 장군은 신라의 직제에서 , 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관리자 (korea781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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