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궁예는 누구인가
1. 개요
궁예의 출생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도 다르고 주인공으로 삼아 쓴 소설에도 일치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학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맹신하는 것이 김부식(金富軾, 1075년~1151년)의 『삼국사기』이다.
이 책은 918년 고려가 건국한 지 227년이 지난 1145년 인종이 명령하여 김부식이 편찬 책임을 맡고 보조를 맡은 8명과 행정 전담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궁예에 대한 평가는 『삼국사기』의 卷50, 「궁예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맹신하는 이 책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 고려가 건국한 지 227년이나 지나서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다는 기본적 약점이 있다.
* 『삼국사기』 편찬 참여 인원이 총12명이라는 점에서 다양성이 떨어지고 역사적 승자인 고려의 기록을 근간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1936년 2월 21일)는 역사서를 배제하고 민담, 지명 유래, 현장 답사를 통한 방식으로 궁예를 새로운 인물로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2. 궁예 관련 중요 사건 10가지
궁예의 관련 유일한 자료인 『삼국사기』卷50, 「弓裔傳」이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이를 중심으로 궁예 관련 중요 사건을 10개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출생
궁예는 경문대왕(景文大王)의 아들로 태어난 날이 오월오일 단오인 중오절이었고 흰빛이 하늘 끝까지 뻗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본 대신들이 심상치 않고 반역의 기운이 있다는 모함을 받아 죽을 운명에 놓인다.
위의 내용 중에서 궁예 출생에 대해서는 헌안왕(憲安王, 통일신라의 제47대왕, 857년부터 861년까지 재위)이라는 설과 경문왕(景文王, 통일신라의 48대왕, 861년~875년까지 재위)설로 대별되고 있다.
* 역사 기록을 보면 헌안왕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고 왕위 계승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경문왕 때는 진골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 궁예도 그중에 하나로 봐야 한다는 설이 학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또 다른 내용은 궁예의 출생일이 중오절로 불길하다는 기록이다. 출생을 나쁘게 표현한 것은 궁예를 불순한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단오를 양기가 양성한 날로 길일로 보고 단오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중오절에 태어난 궁예를 불길한 왕자로 경계한 것은 중국 일부 민족은 ‘기일(忌日)’로 여겨서 불길한 날로 여기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갖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기 제나라 재상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하여 하마터면 버려져서 죽을 뻔하였다. 왕충(王充)의 『론형(論衡』에도 “정월과 오월에 출생하는 자식은 부모를 죽인다고 여겨 양육하려 하지 않는다(讳举正月、五月子。以正月、五月子杀父与母,不得举也。已举之,父母祸死).”라는 금기를 비판한 대목이 있다. - 출처 : 《동북아신문》, 2024년6월10일.
한반도에서 태어난 궁예를 중국의 악습을 적용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봐야 한다. 궁예 출생 과정을 불길하게 기록함으로써 성장과정, 삼한을 제압한 성과, 태봉국의 정통성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