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치하에서 대한민국 품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 성립과 함께 공산치하에 들어가 있던 철원군은 8년 만에 수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수복의 기쁨도 잠시,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 단 숨에 달려 온 실향민들은 풀 한포기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망연자실한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주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를 자랑하던 철원군의 영화도, 전국 최고의 쌀을 생산하던 철원평야의 풍요로움도 모두 사라졌다.
백마고지 전투, 철원삼각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한국전쟁 중 가장 큰 전투는 모두 이 땅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휴전회담 직후 정부(내무부)는 폐허의 땅이지만 엄연히 대한민국의 땅이 된 수복지구에 행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철원군을 비롯해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양양군 그리고 경기도 연천군 등 모두 7개 군이 한국전쟁의 전리품으로 새롭게 대한민국의 땅이 된 것이다.
내무부는 우선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미8군 사령부와 협의, 수복지구의 행정복구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수복지구 인수위원장’을 위촉하는데 철원군에는 당시 조선일보 법률자문을 맡고 있던 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병혁(安秉爀) 선생이 선임된다.
안 선생은 철원군이 군부에서 행정권을 이양 받은 후에도 2, 3년 동안 실질적인 중앙 정부의 파견관으로 일하며 행정복구업무 뿐만 아니라 군부대와 연계해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까지 해결했다.
안 선생의 3남인 창도씨(현 철원군자원봉사센터장)는 당시 바쁘게 보내던 선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며 “군청과 경찰서 청사 자리 잡는 일을 비롯해 법원 검찰청, 신철원 초·중등학교 유치와 교장 물색, 심지어 초대 철원군수의 추천까지 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수복 소식을 듣고 실향민들이 찾아오자 우선 군부에서는 1954년 4월 1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 임시 종합군청(명칭 북부 포천군)을 신설, 포천군을 비롯해 연천 금성 철원 김화 화천 등 7개 군의 실향민들에게 출입증 발급과 모든 편의를 돌봐주었다.
특별조치법 의결 후 행정권 인수 작업 서둘러
1954년 9월 17일 ‘수복지구특별조치법’이 각의에서 의결(발표는 10월 20일)되자 정부는 각 지역의 수복지구 인수위원장과 지역 주둔 지휘관과의 협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행정권을 이양 받도록 지시한다.
내무부는 행정권이 이양되는 동안 혹시 생겨날 치안공백을 위해 서둘러 10월 3일 고성재 경감을 철원경찰서장으로 먼저 발령하고, 경찰서 조직을 하도록 한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 철원군은 1954년 10월 21일, 5군단장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인수 받는데 김화군까지 함께 인수 받는다.
공산치하 5년, 한국전쟁 3년, 군부통제 1년 3개월, 10여년 만에 철원군의 완전 독립 행정이 이루어진 셈이다.
1953년 10월 21일은 군부로부터의 모든 권한을 인수 받은 날이기도 하지만, 공산정권에 빼앗겼던 철원군의 주권이 회복되는 역사적인 날로, 철원군민들은 이날을 ‘철원군 수복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1월 11일 수복지구 인수 위원회에서 추천한 철원 출신이며 군부 관련 민원을 담당했던 김태현 씨가 초대 철원군수로 발령 받는다.
행정권이 이양되었다고 해도 군부의 민간인 출입이 갈말읍 지포리까지 제한되고 있는데다 미군부대가 사용하던 대규모 시설들이 모두 남아 있어 자연스럽게 지포리가 철원군 행정의 중심이 되었고, 이때 새로운 철원이란 뜻으로 신철원이란 새 이름이 생겨난다.
철원군청과 철원경찰서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던 건물(지금의 신철원중학교 터)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미 제9사단과 수도사단 장병들의 도움 커
군청 경찰서 법원 검찰청 우체국 금융조합 등 일반적인 관청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나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뒷받침 해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군민들은 피난살이를 접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 땅을 찾아왔지만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그야말로 노숙자와 다름없는 딱한 처지였다.
그래도 농민들은 단 한 평의 땅이라도 씨앗을 심기위해 농지를 만들고 군청에 와서 종자를 요구하며 삶의 의욕을 되살렸다.
마침 필자와 도의회 의정회 일로 자주 만나는 홍천의 고광환 의원(3대 도의원)이 수복 당시 철원군청에서 10년간 일했던 적이 있어, 처참 했던 당시의 얘기를 생생하게 들었던 적이 있다.
주민들은 군부대에서 제공한 천막으로 난민촌을 만들었고, 쌀은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어 구호물자에 모든 것을 의지했다고 한다.
집을 짓는 일 뿐만 아니라 입고, 먹는 것까지 군부대에 의존했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을 많이 준 군부대가 경기도 운천에 주둔해 있던 미 9사단과 갈말면 문혜리에 주둔해 있던 수도사단 장병들이였다.
특히 미 9사단 장병들은 중장비를 이용해 주민들의 정착지를 마련해주는 한편 생활필수품과 식량을 공급해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며,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갈말국민학교와 갈말중학교 교실을 건립해주고 이어 농협창고, 교회, 법원 등도 건립해줘 주민들은 폐허의 땅에서 삶의 불씨를 이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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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철원군민들은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미 제9사단 마구르드 사단장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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